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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F

카쉬파의 숨겨진 기록 #2 또 다른 부화

by happy-hour 2019. 3. 7.

#2. 또 다른 부화  글 : 진공 / 그림 : Kida





"…젠장…."

얼음처럼 찬 빗방울이 마른 뺨을 에일 듯이 두드렸다. 번쩍, 눈을 뜬 그가 숨보다 먼저 뱉은 것은 욕지거리였다. 밤의 마천루 중심, 부서진 건물 더미 틈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던 스니프 케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습관처럼 귀밑머리를 꽂아 넘기고 옷 매무새를 확인하는 손의 떨림이 멈출 줄 몰랐다.

금색의 별이 발하는 빛조차 희붐해진 먹색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조용히 땅을 적시던 비가 피딱지 앉은 그의 얼굴까지 씻어 내린다. 한참을 맞으며 숨을
골랐다. 속에는 여전히 씻기지 않는 것이 있어 입안이 쓰다.

사도.

그 이름의 무게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까마득히 먼 옛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이 행성에 올라탔다는 이계의 존재들. 저들끼리만 알아보는 특별한 기운을
가졌다는 선택 받은 강자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스워진 것도 사실이다. 하루아침에 이 땅에서 모습을 감춘 자가 많았고, 그중 몇몇은 신분조차 불분명한 자들의 손에 처참히 죽임당했단
소문까지 돌았으니까. 할렘의 녀석들은 사도보단 카쉬파라는 이름에 몸을 떨었고, 고상한 척 시비를 따지고 들던 녀석들도 카쉬파의 영역 안에선 제 목숨
구걸하기 바빴으니까. 그렇다 해도…

사도, 이시스 - 프레이.

그 이름까지 얕본 것은 오만이었다. 테이베르스에서 넘어 온 괴물들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괴물들을 향해 뛰어든 '모험가'라 불리는 자의
기개 역시 높이 살 만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위에 '가장 높은 자'가 있었다. 모두가 탐냈던 어둠을 빨아들이며, 일련의 사건을 종결 지은 천공의 왕.
치욕스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도는 강하다. 개줄의 리더라 해 봤자 저 역시도 개줄에 묶인 신세. 줄을 쥔 자의 명령을 따라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스니프
케이는 사도는커녕 그를 추종하는 괴물 앞에서조차 맥을 못 추는, 그저 그런 카쉬파의 졸개일 뿐이었다.

"하아. 비 맞는 건 끔찍하게 싫은데 말이지."

스니프 케이는 빗물에 젖어 진흙 범벅이 된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던 한쪽 어깨가 욱신거리며 고통을 전했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보고를
해야겠지. 마치기도 전에 숨통이 끊길지 모른다. 취할만한 정보를 물어왔다 해도 임무에 실패한 부하를 살려 둘만큼 자애로운 분들이 아니니. 문득, 이 지팡이질
한 번에 무력하게 죽어 갔던 하찮은 벌레들의 눈빛이 스쳐 간다. 존재감 없이 사라져 간 무대 위 단역들.

쿡, 하고 자조적인 웃음이 터지려던 찰나였다.

"…히카르도?"

홱 몸을 돌린다. 내딛는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는다. 분명 그 녀석의 마력이다. 코앞에서 자취를 감췄던 것이 다시 이곳, 밤의 마천루에 나타났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던 거지? 왜 다시 이곳에 나타난 거지? 수많은 의문이 스니프 케이의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지금 그를 움직이는 것은 단 하나의 집념이었다.

히카르도를 찾아야 한다.

와중에도 기척을 숨기고 발소리를 낮춘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 속 생생한 그 붉은 괴물의 둥지를 향해 되돌아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지체하지 않았다.
부하들을 찢어발긴 괴물의 모가지를 가지고 갈 수 없다면, 히카르도, 그놈의 생살이라도 뜯어 가는 것이 스니프 케이가 살 길이었다. 놈의 마력이 가까워질수록
본데없이 속이 들끓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기대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다.'

잠시 숨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닿기만 해도 타는 듯 뜨거운 숨을 뱉던 괴물도, 밤의 마천루의 어둠을 물리치며 존재를 과시했던 사도의 알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땅을 적시는 빗소리만이 일정할 뿐.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여 본다.

아니, 있다. 사도의 알이다. 사라지지 않았다. 빛을 잃었을 뿐이다. 부서진 건물 잔해 더미 사이에 얌전히 앉아 있는 사도의 알에는 압도적인 마력도, 빨려 들어갈
듯한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전에 봤을 때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난리통에 겉껍데기가 작살난 건가. 저래서야 가져가도 좋은 소리 못 듣겠는데. 안이 텅
비어서 뭐가 제대로 남아 있기나 하겠…

잠깐.

히카르도의 마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니프 케이의 감각은 틀린 적 없다. 다시 한번 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꿰뚫듯 응시한다.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부서진 알껍질 속에, 낮게 웅크린 무언가를.

스니프 케이는 웃고 있었다. 카쉬파 놈들 치고 제대로 써 먹을만한 놈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명색이 마귀의 리더라는 자가 이토록 멍청할 줄이야. 하지만
덕분에 살았다. 험한 꼴을 좀 보긴 했지만, 그 핑계로 쏟아지는 업무를 잠깐 미룰 수도 있을 것이다. 유유히 빗속을 걸어 깨진 알껍질 앞에 서고 보니, 이 고맙도록
덜떨어진 녀석에게 적당한 아량을 베풀어 주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히카르도."

돌아오는 답이 없으리라는 건 예상했다. 지팡이 끝에 달린 뱀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되새겼다. 쫓는 자의 가장 큰 미덕은 언제나 기다림에 있다.

"이렇게 어설프면 어쩌잔 거야. 이래서야 내가 못 본 척 하기도 민망… 컥!"



알껍질에서 무언가 팍 하고 튀어나오더니, 별안간 스니프 케이의 숨통을 틀어쥐었다. 버둥거리며 만져보니 손, 분명 손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아귀힘이
스니프 케이의 모가지를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숨은 쉬어지지 않는데, 폐 속은 가득 채워지는 것 같다. 내장이 심장을 휘감는 듯한데, 두 눈은 감을 수가 없다.
부릅뜬 채 내려다본 알껍질 속, 그 어둠 안에 분명 그 녀석이 있었다. 언제, 왜, 어떻게….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물음들이 빗소리에 묻혀 사라져
갔다.


얼음처럼 찬 빗방울이 목덜미를 에일 듯이 두드렸다. 번쩍, 눈을 뜬 그가 입꼬리를 찢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밤의 마천루 중심, 부서진 사도의 알 앞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던 스니프 케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에 젖은 얼굴을 한 손으로 대충 훔친다.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귓바퀴에 맺힌 물을 턴다. 목
부분에 감긴 귀찮은 버클은 뜯어 버리고,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 부서진 알 위에 마른 손을 올린다. 지팡이를 쓰지 않고도 흘려보낸 마력에 알껍질이 반응하며
몸을 띄운다. 이윽고, 그가 뒤돌아본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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