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앤파이터 던파 블레이드 오디오 북 : 하얀기
Story
"꺄아악!"
"어서 도망쳐!"
처절한 소녀들의 비명과 미노타우르스의 괴성이 뒤섞인 아수라장에서 소녀의 시야에 모든 장면이 각인 되듯 새겨졌다.
가축을 우리에 가두어 놓듯 만들어진 공터에 좌절하고 분노하는 어린 소녀들…
그 장면을 마치 체스말 구경하듯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제국의 간부들과 황제…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소녀들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날카롭고 기다란 창으로 무자비하게 내리찍는 병사들까지…
바로 옆에서 도망치던 소녀가 미노타우르스의 거대한 도끼에 짓이겨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눈 속에 새기며 소녀는 넋 나간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소녀가 바라보는 하늘이 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정말로 하늘이 하얘졌는지도 모른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어둡고 차가운 방에 어린 소녀들이 웅크려 앉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이들을 가둬 놓기 위함인지,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아이들을 숨기기 위함인지…
마치 감옥처럼 외부로부터 아이들을 단절시킨 폐쇄된 공간에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비릿한 혈흔 냄새가 뒤섞여 불쾌한 악취를 풍겼다.
두려움과 분노로 떠는 아이들 가운데에서 유난히 작은 소녀가 감정 없는 회색 눈으로 주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소녀들은 하나같이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잔혹하고도 무자비한 전이 실험의 영향으로 아직 글도 제대로 못 익힌 어린아이들이 노인 마냥 새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지닌 채 옹송그리고 있었다.
몇몇 영특한 아이들은 자신의 신체에 벌어지는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지만, 대부분의 소녀는 당장의 고통과 두려움에 떠는 것이 전부였다.
반복되는 실험과 훈련 탓에 고장 난 인형처럼 감정 없는 눈빛으로 넋을 놓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지금의 소녀처럼 말이다.
"아… 피…"
소녀는 실험장에 풀어진 미노타우르스를 피하다 생긴 맨발의 생채기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남의 상처를 대하듯 고통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새까맣게 얼룩지고 딱지 앉은 발꿈치를 바라보던 소녀는 이내 감흥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새까만 방을 벗어나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능력을 각성해서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능력을 각성 시켜 제국 병사에게 이곳에서 끌려나가는 것이다.
두 가지 다 강해져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물론… 전자의 경우는 영원한 자유를 얻는 대신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고, 후자 또한 더 지독한 고통과 실험이 기다릴 것이 자명했다.
고작 어른 서너 명이 누울만한 좁은 방. 이 어둡고 좁은 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과 반복되는 고통이 소녀들을 늪처럼 옭아맸다.
"거기 너, 나와라."
소녀들의 눈빛이 변했다. 형형한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과 두려움에 소스라쳐 질겁하는 눈빛들.
불려진 소녀는 부들부들 떨며 궁지에 몰린 새끼 늑대처럼 몸을 움츠린 채 이를 드러냈다.
순순히 나오지 않을 것이란 걸 예상했는지, 장정 서넛이 전이 에너지를 억제하는 구속구가 달린 긴 막대기로 위협하듯 소녀에게 들이밀었다.
마치 자석이 달라붙듯 에너지를 인지한 구속구가 소녀의 손목을 감으며 압박했다.
"이거 놔! 죽여버릴 거야! 싫어! 싫어어엇!"
끌려나가는 소녀를 바라보는 다른 소녀들의 눈빛은 자신도 끌려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반드시 이곳을 탈출하겠다는 각오로 뒤섞였다.
그런 소녀들 사이에서 왜소한 소녀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동료가 끌려나간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끌려나간 동료는 오늘 미노타우르스 실험 중 각성한 소녀였다.
미노타우르스들에게 포위당한 순간 그녀는 비명과 같은 괴성을 지르며 그것들을 짓이겨 버렸고, 제국 간부들에게 눈에 띄어 다음 실험 단계를 위해 옮겨진 것이다.
능력을 각성한다 해도 처지는 다르지 않다.
케이스가 바뀌었을 뿐, 실험용 쥐라는 것은 여전하니까…
몸을 웅크리고 다리를 끌어안은 소녀는 다음 실험을 대비해 체력을 비축하려 눈을 감았다.
그때, 철재 문 너머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각성하지 않는 실험체 상대로 정리를 한 번 한다면서? 풀어주는 건가?"
"미쳤어? 가뜩이나 쉬쉬하면서 벌이는 실험인데 얘기가 새어나가면 어쩌려고?"
"그러면…"
침묵과 함께 어두컴컴한 골방 안에 더욱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 들었다.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소녀는 그녀를 포함해 다섯.
처음 이 방에 들어왔던 소녀들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였다.
절반은 실험 중 죽어 나갔고, 일부는 제국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수십 번을 반복한 실험 끝에도 별다른 능력의 변화가 없는 아이들은 다른 실험체로 쓰이거나… 또는 쓰다 버리는 소모품처럼 처분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본능적으로 이를 감지한 소녀였지만 표정은 지독하리만치 침착했다.
마음 한구석에는 차라리 다른 실험 재료로 쓰일 바에는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 엇! 크로웰님!"
"이,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로 직접 내려오셨습니까?"
"언급은 받았겠지. 별다른 능력을 보이지 못하는 실험체들의 처분에 대한 지시가 있었다. 내가 직접 인계할 테니 아이들을 데려 나오거라."
"옙!"
구속구가 채워진 채 끌려 나온 소녀들은 하나같이 분노와 절망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런 소녀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크로웰은 구속구의 줄을 병사들에게 넘겨받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거대하고 단단한 체구의 사내를 본 순간 소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다른 병사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강자라는 것을 느꼈다.
황실의 지위나 귀족의 체계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녀였지만, 다른 병사들이 대하는 태도나 그가 입은 번쩍거리는 갑옷만 보아도 그의 직위가 남다르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구속구를 착용한 소녀들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분노로 형형한 눈빛을 하면서도 잠자코 크로웰이 잡아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실험실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숲으로 소녀들을 끌고 들어간 크로웰은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다 싶은 순간 우뚝 걸음을 멈췄다.
멈춰선 거대한 등이 한동안 움직임 없이 침묵하고 있자 소녀들 사이에 누군가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태산과 같은 거대한 등이 소녀들에게는 또 다른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몸을 돌리는 크로웰의 표정은 달빛을 등지고 있는 채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탈출구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끝없는 절망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으니까.
크로웰이 허리춤에 걸린 새하얀 검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어떤 아이는 눈을 질끈 감았고, 어떤 아이는 어떻게서든 구속구를 풀어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 가운데 소녀는 물러섬 없이 똑바로 새하얀 검신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춘 하얀 검신은 포물선을 그리며 소녀의 위로 내리그어졌다.
소녀는 검푸른 밤하늘을 가르는 하얀 포물선을 하나도 빠짐없이 바라보았다.
그 검격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은하수 같다고 생각했다.
고통이라는 족쇄에서 해방해줄 아름다운 은하수.
소녀의 가슴으로 그어질 줄 알았던 새하얀 검격은 소녀의 손목을 감고 있던 구속구로 향했다.
소녀는 연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크로웰을 바라보았다.
크로웰은 흙바닥에 새하얀 검신을 꽂아 넣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가까워진 크로웰의 얼굴로 그제야 달빛이 어스름하게 비추며 표정이 드러났다.
그의 표정은 죄책감과 연민, 후회 등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너희도 나와 병사들이 지켜야 할 제국의 아이들이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그렇게 말하는 크로웰의 얼굴에 늘어진 그림자가 더욱 그의 표정을 괴로워 보이게 했다.
병사들이 깍듯이 존대하던 자가 허리를 숙였음에도 소녀는 여전히 미동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좀 전까지는 태산과 같이 느껴지던 어깨가 유독 작아 보였다.
소녀를 바라보는 크로웰의 시선에 많은 감정이 스치는 듯했다.
그럼에도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과 한마디로 그동안의 절망과 고통이 물에 씻기듯 사라질 리 없었다.
그것은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지우고 씻어내려 해도 살갗에 깊게 새겨진 낙인.
"지금까지의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거란 건 안다. 하지만 모든 제국의 사람들이 너희가 겪은 사람들 같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슬퍼 보이는 크로웰의 눈을 물러섬 없이 덤덤하게 바라보던 소녀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의 명을 어기겠다는 거야?"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내뱉을 수 있는 지독히도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질문에 크로웰의 표정이 잠시 굳어진 듯했다.
하지만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은 크로웰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다시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마. 너희의 기억에서 지워진 부모님을 대신해서…"
그의 말에는 많은 의미와 뜻이 담겨 있었지만, 그때까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큰 희생과 각오로 그녀를 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존재가 될지…
먼 훗날 이날의 기억을 하얗게 바랠 때까지 얼마나 되새기고 되새기며 그리워할지…